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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모리치오 비롤리 지음
인간사랑
2006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하루 종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얼마나 불안한지를.

소대장이, 그리고 선임하사가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자유다. 아니 자유방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왜냐하면, 언제 불시에 가혹한 지시가 내려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18세기 사상가 루소는 법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무정부상태에서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짓밟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에 의해 서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우리 모두의 자유는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를 규제, 법, 정부와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법과 정부는 무능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조롱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이야기 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무정부상태의 ‘가짜’ 자유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인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는 단호하게 ‘그러한 자유는 가짜’라고 말한다. 그는 법의 개입 없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없다고 한다. 법의 도움 없이 힘 센 자들은 약한 자들을 노예처럼, 종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힘 센 자들이 마치 주인처럼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주종적 지배’ 또는 ‘사적 지배’라 부른다. 영어로는 ‘domination'이다.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속‘(隸屬: dependence)이다.

이런 상태에서 약자들에게 무한대의 간섭받지 않는 여가가 주어진다 해도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비롤리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시간을 만끽하는 노예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병역과 세금납부의 의무에다 제 손으로 노동해서 생활해야 하는 자유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나날을 보내지만 언제 주인이 돌아와 채찍질 당하게 될지 모르는 노예가 될 것인가?’

그는 신자유주의가 퍼뜨리려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이 결국 강자가 약자를 제 맘대로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비자유’의 공간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비롤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남편의 횡포에 저항하거나 배상을 요구할 수 없는 아내, 사용자나 감독자의 횡포에 노출되어 있는 근로자들, 남들의 자선행위(慈善行爲)에 의존해 있는 병자나 독고(獨孤) 노인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자. 아내들을 예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의 자의적 권력을 제한하면서 가정내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가져야 한다. 근로자들을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려면 근로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존엄을 지켜주고, 또한 사용자의 자의적 권력을 통제하는 법이 필요하다. 궁핍한 사람들을 자선행위로부터 해방시키려면, 이들에게 충분한 공적부조(公的扶助)를 보장할 수 있도록 세금을 올려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서 보듯이, 어떤 시민들에게서 예속을 제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간섭받지 않으려는 ‘소극적’) 자유에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즉,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에게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예속을 줄이기 위해서는 법적 제약을 늘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종적 지배(또는 예속)와 법에 의한 제약(속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공화주의적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워 시민적 의무를 약화시키는 정책들보다는 주종적 지배관계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자면 비롤리는 우리들에게 다음을 명심하라고 당부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과 달리 여러분들의 자유를 축소할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면서 공화주의는 법에 의한 제약을 통해 ‘주종적 지배’와 ‘예속’이 판치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비롤리의 말을 인용하면 공화주의는 “자유의 원리를 숭상하면서, 이 자유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법적 수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이론 체계”인 것이다.

‘비자유의 공간’에 대비되는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공화주의자들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 부른다. ‘리퍼블릭’(republic)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레스 푸블리카 에서 모든 사람들은 타인들의 변덕에 눈치 보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이렇게 당당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만이 ‘영웅 숭배’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공간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적절한 참여 속에서 가능하다. 참여의 과잉이나 배제가 아닌, ‘적절한 참여’가 문제인데 그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공화주의는) 참여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론으로서, 자유를 지키는데 있어 시민들의 주권적 정치과정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이러한 참여는 명확히 규정된 틀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화주의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는 ‘대의제적 자기통치’에 관한 이론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 정치의 양대 사상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보다 넓고 비옥한 사상체계인 공화주의 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의 풍부한 유산을 절반씩만 나눠가진 ‘사상적 자식’이라는 것이 비롤리의 생각이다.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 있는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당면해 있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때맞추어 출간된 『공화주의』는 전문가 집단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하루 종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얼마나 불안한지를.

소대장이, 그리고 선임하사가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자유다. 아니 자유방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왜냐하면, 언제 불시에 가혹한 지시가 내려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18세기 사상가 루소는 법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무정부상태에서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짓밟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에 의해 서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우리 모두의 자유는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를 규제, 법, 정부와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법과 정부는 무능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조롱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이야기 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무정부상태의 ‘가짜’ 자유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인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는 단호하게 ‘그러한 자유는 가짜’라고 말한다. 그는 법의 개입 없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없다고 한다. 법의 도움 없이 힘 센 자들은 약한 자들을 노예처럼, 종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힘 센 자들이 마치 주인처럼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주종적 지배’ 또는 ‘사적 지배’라 부른다. 영어로는 ‘domination'이다.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속‘(隸屬: dependence)이다.

이런 상태에서 약자들에게 무한대의 간섭받지 않는 여가가 주어진다 해도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비롤리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시간을 만끽하는 노예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병역과 세금납부의 의무에다 제 손으로 노동해서 생활해야 하는 자유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나날을 보내지만 언제 주인이 돌아와 채찍질 당하게 될지 모르는 노예가 될 것인가?’

그는 신자유주의가 퍼뜨리려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이 결국 강자가 약자를 제 맘대로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비자유’의 공간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비롤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남편의 횡포에 저항하거나 배상을 요구할 수 없는 아내, 사용자나 감독자의 횡포에 노출되어 있는 근로자들, 남들의 자선행위(慈善行爲)에 의존해 있는 병자나 독고(獨孤) 노인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자. 아내들을 예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의 자의적 권력을 제한하면서 가정내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가져야 한다. 근로자들을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려면 근로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존엄을 지켜주고, 또한 사용자의 자의적 권력을 통제하는 법이 필요하다. 궁핍한 사람들을 자선행위로부터 해방시키려면, 이들에게 충분한 공적부조(公的扶助)를 보장할 수 있도록 세금을 올려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서 보듯이, 어떤 시민들에게서 예속을 제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간섭받지 않으려는 ‘소극적’) 자유에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즉,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에게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예속을 줄이기 위해서는 법적 제약을 늘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종적 지배(또는 예속)와 법에 의한 제약(속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공화주의적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워 시민적 의무를 약화시키는 정책들보다는 주종적 지배관계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자면 비롤리는 우리들에게 다음을 명심하라고 당부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과 달리 여러분들의 자유를 축소할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면서 공화주의는 법에 의한 제약을 통해 ‘주종적 지배’와 ‘예속’이 판치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비롤리의 말을 인용하면 공화주의는 “자유의 원리를 숭상하면서, 이 자유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법적 수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이론 체계”인 것이다.

‘비자유의 공간’에 대비되는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공화주의자들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 부른다. ‘리퍼블릭’(republic)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레스 푸블리카 에서 모든 사람들은 타인들의 변덕에 눈치 보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이렇게 당당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만이 ‘영웅 숭배’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공간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적절한 참여 속에서 가능하다. 참여의 과잉이나 배제가 아닌, ‘적절한 참여’가 문제인데 그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공화주의는) 참여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론으로서, 자유를 지키는데 있어 시민들의 주권적 정치과정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이러한 참여는 명확히 규정된 틀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화주의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는 ‘대의제적 자기통치’에 관한 이론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 정치의 양대 사상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보다 넓고 비옥한 사상체계인 공화주의 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의 풍부한 유산을 절반씩만 나눠가진 ‘사상적 자식’이라는 것이 비롤리의 생각이다.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 있는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당면해 있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때맞추어 출간된 『공화주의』는 전문가 집단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하루 종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얼마나 불안한지를.

소대장이, 그리고 선임하사가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자유다. 아니 자유방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왜냐하면, 언제 불시에 가혹한 지시가 내려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18세기 사상가 루소는 법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무정부상태에서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짓밟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에 의해 서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우리 모두의 자유는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를 규제, 법, 정부와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법과 정부는 무능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조롱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이야기 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무정부상태의 ‘가짜’ 자유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인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는 단호하게 ‘그러한 자유는 가짜’라고 말한다. 그는 법의 개입 없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없다고 한다. 법의 도움 없이 힘 센 자들은 약한 자들을 노예처럼, 종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힘 센 자들이 마치 주인처럼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주종적 지배’ 또는 ‘사적 지배’라 부른다. 영어로는 ‘domination'이다.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속‘(隸屬: dependence)이다.

이런 상태에서 약자들에게 무한대의 간섭받지 않는 여가가 주어진다 해도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비롤리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시간을 만끽하는 노예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병역과 세금납부의 의무에다 제 손으로 노동해서 생활해야 하는 자유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나날을 보내지만 언제 주인이 돌아와 채찍질 당하게 될지 모르는 노예가 될 것인가?’

그는 신자유주의가 퍼뜨리려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이 결국 강자가 약자를 제 맘대로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비자유’의 공간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비롤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남편의 횡포에 저항하거나 배상을 요구할 수 없는 아내, 사용자나 감독자의 횡포에 노출되어 있는 근로자들, 남들의 자선행위(慈善行爲)에 의존해 있는 병자나 독고(獨孤) 노인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자. 아내들을 예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의 자의적 권력을 제한하면서 가정내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가져야 한다. 근로자들을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려면 근로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존엄을 지켜주고, 또한 사용자의 자의적 권력을 통제하는 법이 필요하다. 궁핍한 사람들을 자선행위로부터 해방시키려면, 이들에게 충분한 공적부조(公的扶助)를 보장할 수 있도록 세금을 올려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서 보듯이, 어떤 시민들에게서 예속을 제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간섭받지 않으려는 ‘소극적’) 자유에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즉,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에게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예속을 줄이기 위해서는 법적 제약을 늘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종적 지배(또는 예속)와 법에 의한 제약(속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공화주의적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워 시민적 의무를 약화시키는 정책들보다는 주종적 지배관계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자면 비롤리는 우리들에게 다음을 명심하라고 당부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과 달리 여러분들의 자유를 축소할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면서 공화주의는 법에 의한 제약을 통해 ‘주종적 지배’와 ‘예속’이 판치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비롤리의 말을 인용하면 공화주의는 “자유의 원리를 숭상하면서, 이 자유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법적 수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이론 체계”인 것이다.

‘비자유의 공간’에 대비되는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공화주의자들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 부른다. ‘리퍼블릭’(republic)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레스 푸블리카 에서 모든 사람들은 타인들의 변덕에 눈치 보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이렇게 당당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만이 ‘영웅 숭배’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공간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적절한 참여 속에서 가능하다. 참여의 과잉이나 배제가 아닌, ‘적절한 참여’가 문제인데 그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공화주의는) 참여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론으로서, 자유를 지키는데 있어 시민들의 주권적 정치과정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이러한 참여는 명확히 규정된 틀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화주의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는 ‘대의제적 자기통치’에 관한 이론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 정치의 양대 사상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보다 넓고 비옥한 사상체계인 공화주의 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의 풍부한 유산을 절반씩만 나눠가진 ‘사상적 자식’이라는 것이 비롤리의 생각이다.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 있는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당면해 있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때맞추어 출간된 『공화주의』는 전문가 집단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하루 종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얼마나 불안한지를.

소대장이, 그리고 선임하사가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자유다. 아니 자유방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왜냐하면, 언제 불시에 가혹한 지시가 내려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18세기 사상가 루소는 법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무정부상태에서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짓밟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에 의해 서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우리 모두의 자유는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를 규제, 법, 정부와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법과 정부는 무능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조롱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이야기 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무정부상태의 ‘가짜’ 자유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인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는 단호하게 ‘그러한 자유는 가짜’라고 말한다. 그는 법의 개입 없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없다고 한다. 법의 도움 없이 힘 센 자들은 약한 자들을 노예처럼, 종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힘 센 자들이 마치 주인처럼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주종적 지배’ 또는 ‘사적 지배’라 부른다. 영어로는 ‘domination'이다.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속‘(隸屬: dependence)이다.

이런 상태에서 약자들에게 무한대의 간섭받지 않는 여가가 주어진다 해도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비롤리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시간을 만끽하는 노예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병역과 세금납부의 의무에다 제 손으로 노동해서 생활해야 하는 자유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나날을 보내지만 언제 주인이 돌아와 채찍질 당하게 될지 모르는 노예가 될 것인가?’

그는 신자유주의가 퍼뜨리려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이 결국 강자가 약자를 제 맘대로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비자유’의 공간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비롤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남편의 횡포에 저항하거나 배상을 요구할 수 없는 아내, 사용자나 감독자의 횡포에 노출되어 있는 근로자들, 남들의 자선행위(慈善行爲)에 의존해 있는 병자나 독고(獨孤) 노인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자. 아내들을 예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의 자의적 권력을 제한하면서 가정내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가져야 한다. 근로자들을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려면 근로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존엄을 지켜주고, 또한 사용자의 자의적 권력을 통제하는 법이 필요하다. 궁핍한 사람들을 자선행위로부터 해방시키려면, 이들에게 충분한 공적부조(公的扶助)를 보장할 수 있도록 세금을 올려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서 보듯이, 어떤 시민들에게서 예속을 제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간섭받지 않으려는 ‘소극적’) 자유에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즉,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에게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예속을 줄이기 위해서는 법적 제약을 늘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종적 지배(또는 예속)와 법에 의한 제약(속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공화주의적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워 시민적 의무를 약화시키는 정책들보다는 주종적 지배관계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자면 비롤리는 우리들에게 다음을 명심하라고 당부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과 달리 여러분들의 자유를 축소할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면서 공화주의는 법에 의한 제약을 통해 ‘주종적 지배’와 ‘예속’이 판치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비롤리의 말을 인용하면 공화주의는 “자유의 원리를 숭상하면서, 이 자유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법적 수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이론 체계”인 것이다.

‘비자유의 공간’에 대비되는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공화주의자들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 부른다. ‘리퍼블릭’(republic)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레스 푸블리카 에서 모든 사람들은 타인들의 변덕에 눈치 보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이렇게 당당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만이 ‘영웅 숭배’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공간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적절한 참여 속에서 가능하다. 참여의 과잉이나 배제가 아닌, ‘적절한 참여’가 문제인데 그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공화주의는) 참여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론으로서, 자유를 지키는데 있어 시민들의 주권적 정치과정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이러한 참여는 명확히 규정된 틀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화주의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는 ‘대의제적 자기통치’에 관한 이론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 정치의 양대 사상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보다 넓고 비옥한 사상체계인 공화주의 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의 풍부한 유산을 절반씩만 나눠가진 ‘사상적 자식’이라는 것이 비롤리의 생각이다.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 있는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당면해 있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때맞추어 출간된 『공화주의』는 전문가 집단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하루 종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얼마나 불안한지를.

소대장이, 그리고 선임하사가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자유다. 아니 자유방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왜냐하면, 언제 불시에 가혹한 지시가 내려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18세기 사상가 루소는 법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무정부상태에서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짓밟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에 의해 서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우리 모두의 자유는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를 규제, 법, 정부와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법과 정부는 무능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조롱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이야기 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무정부상태의 ‘가짜’ 자유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인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는 단호하게 ‘그러한 자유는 가짜’라고 말한다. 그는 법의 개입 없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없다고 한다. 법의 도움 없이 힘 센 자들은 약한 자들을 노예처럼, 종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힘 센 자들이 마치 주인처럼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주종적 지배’ 또는 ‘사적 지배’라 부른다. 영어로는 ‘domination'이다.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속‘(隸屬: dependence)이다.

이런 상태에서 약자들에게 무한대의 간섭받지 않는 여가가 주어진다 해도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비롤리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시간을 만끽하는 노예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병역과 세금납부의 의무에다 제 손으로 노동해서 생활해야 하는 자유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한 나날을 보내지만 언제 주인이 돌아와 채찍질 당하게 될지 모르는 노예가 될 것인가?’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 있는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당면해 있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때맞추어 출간된 『공화주의』는 전문가 집단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